드디어 대법원에서 고 도예종씨 등 9명의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하면서 사법부 역사의 치욕으로 남아 있던 인혁당 사건 재판이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아직 피해자들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이 일부 남아 있지만 유무죄를 가리는 형사 재판은 사실상 끝났다고 하며 중앙정보부 수사 발표 이후 51년 만이며 대법원 첫 판결 후 50년 만이라고 합니다.


인혁당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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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8월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북한 노동당의 지령을 받고 국가 변란을 기획한 인민혁명당 사건을 적발해 일당 57명 중 41명을 구속하고 16명을 수배중이다"


라는 발표문을 낭독했는데 이것이 바로 박정희 정권의 대표적 공안조작 사건인 1차 인민혁명당 사건의 시작이었습니다.


박정희 정권의 대표적 공안조작 사건인 1차 인민혁명당 사건의 시작박정희 정권의 대표적 공안조작 사건인 1차 인민혁명당 사건의 시작


그 당시에는 학생들을 중심으로 해서 정권 반대 시위가 이루어지고 정부가 6월 2일 비상계엄을 선포하는 등 시국은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인혁당 사건 기소 이후에도 나체로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했다는 사실과 사건 조작설이 퍼졌습니다. 



기소당한 26명중에서 14명은 공소취소로 석방이 되었지만 이후 추가로 구속된 1명 등 13명이 반공법 위반 등으로 재판에 넘겨셔 전원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대법원에서 1965년 유죄 판결을 그대로 확정했으며 1974년에 유신 반대운동이 급속히 확산하자 중앙정보주에서 인혁당 재건위 사건, 이른바 2차 인혁당 사건을 발표하게 됩니다.


이유?


"인혁당 재건위가 북한의 조종을 받아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민청학련을 조종하고 국가를 전복하려 했다는 것"


입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박정희 전 대통령


또한 2차 인혁당 사건에 1차 인혁당 사건으로 징혁 3년을 선고받았던 도씨가 또 연루되었다고 지목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2차 인혁당 사건에서는 20여명이 재판에 넘겨졌고 도씨 등 8명은 사형선고를 받았는데 8명은 판결이 내려지고 나서 불과 18시간 만에 형이 집행되면서 최악의 사법 살인이라는 오명이 붙게 됩니다.


 사법부는 부끄러운줄 알라 사법부는 부끄러운줄 알라


2차 인혁당 사건의 유족들은 의문사위원회 진상조사 결과 등을 근거로 2002년 법원에 재심 신청을 냈고 2007∼2008년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으며 1차 인혁당 사건의 피해자들도 2011년 재심을 청구했고, 대법원에서 유죄를 선고받은 지 50년 만인 이달 29일 대법원에서 무죄확정을 받았습니다.


어찌해서 상식적으로도 무죄가 확실한 사건이 50년만에 무죄판결을 받을 수 있는 것인지. 


박정희 군사 독재 정부에 의해서 희생당한 사람들, 명복을 빕니다. 

무죄판결이 나도 사과하는 사람도 없는 이런 나라에 정의라는 것이 있는 것인지 궁금합니다.